국산 NPU는 AI 칩 도미노를 피할 수 있나 — 헤일로·그록이 팔린 진짜 이유
지난 편 마지막에 이렇게 적어뒀습니다. “국산 NPU는 그 도미노를 피할 수 있나, 다음에 따로 한 편으로 풀어보겠다.” 그 한 주 사이에 도미노가 한 칸 더 넘어갔어요. 7월 24일, 이스라엘 AI 칩 회사 헤일로가 미국 마이크로칩에 팔린다는 확정 계약이 나왔습니다.
같은 주 한국에서는 정반대로 생긴 뉴스가 나왔죠.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공공 CCTV 1만 8,100여 대에 국산 NPU를 얹겠다고 밝혔고(7월 28일), SK텔레콤은 6,880억 파라미터짜리 모델을 오픈 라이선스로 풀었습니다(7월 29일).
밖에서는 칩 회사가 팔리고, 안에서는 칩 회사에 일감을 만들어 주고 있어요. 그래서 이 질문이 생깁니다. 한국이 택한 방식은 저 도미노를 피하는 길일까요? 미리 말씀드리면 방향은 맞는데, 지금 규모로는 조건이 붙습니다. 숫자로 따라가 볼게요.
① 한 달 사이에 또 넘어간 도미노
ZDNet 코리아가 7월 30일 이 흐름을 한 번에 정리했는데, 목록이 꽤 깁니다. 제가 따로 확인해 본 것만 옮기면 이렇습니다.
- 헤일로 → 마이크로칩(2026년 7월 24일 확정 계약, 금액 비공개). 기기에 직접 넣는 엣지용 AI 칩을 만들던 회사고, 누적 투자 3억 4,000만 달러에 한때 기업가치가 10억 달러를 넘겼습니다. 그런데 SPAC 합병이 무산되고 가치가 5억 달러 아래로 내려간 뒤에 팔렸어요.
- 그록(Groq) → 엔비디아(2025년 12월 24일, 약 200억 달러). 엔비디아 사상 최대 규모입니다. 다만 회사를 통째로 산 ‘인수’와는 결이 좀 달라요. 자산과 인력을 가져가고 LPU 기술은 비독점으로 라이선스하는 구조였고, 그록의 클라우드 사업은 빠졌습니다. 석 달 전 기업가치가 69억 달러였으니 3배 가까운 값이 붙은 셈이죠.
- 하바나랩스 → 인텔(2019년, 20억 달러), 그래프코어 → 소프트뱅크. 이쪽은 이미 지난 이야기입니다.
- 텐스토렌트 → 퀄컴은 아직 진행형이에요. 짐 켈러가 이끄는 회사고, 80억~100억 달러 규모로 인수를 추진 중이라는 보도가 6월부터 나왔습니다. 협상 단계라 깨질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게 있습니다. 팔린 값이 제각각이에요. 그록은 마지막 기업가치의 3배 가까이 받았고, 헤일로는 반토막이 난 다음에 팔렸습니다. 같은 ‘인수’라는 단어로 묶여 있지만 성격이 달라요. 하나는 데려간 거고, 다른 하나는 정리에 가깝습니다.
② 칩이 나빠서 팔린 게 아닙니다
이 목록을 보면 “역시 스타트업 칩은 성능이 안 되는구나” 싶은데, 기사가 드는 이유는 성능이 아니에요. 크게 두 가지로 묶입니다.
첫째, 칩 회사는 사실 소프트웨어 회사입니다. 기사에 이런 표현이 나와요. “하드웨어보다 소프트웨어 인력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하다”, “출시 후에는 소프트웨어 고정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칩을 악기라고 치면 소프트웨어는 악보예요. 악기를 잘 만들어 놨는데 세상의 유행곡이 반년마다 바뀝니다. 새로운 구조의 AI 모델이 하나 뜰 때마다 그 연산에 맞는 커널을 새로 짜고 컴파일러를 다시 맞춰야 하거든요. 엔비디아의 CUDA가 무서운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칩이 빨라서가 아니라, 그 악보를 십수 년간 쌓아 뒀기 때문이죠. 칩 출시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고, 그 뒤로 고정비가 계속 나갑니다.
둘째, 손님이 누군지 모르는 채로 몇 년 앞을 설계해야 합니다. 구글이나 아마존은 자기가 굴릴 서비스 로드맵을 갖고 있으니 3년 뒤에 필요한 칩을 지금 설계할 수 있어요. 스타트업은 다릅니다. 3년 뒤 어떤 고객이 어떤 모델을 돌릴지 모르는 채로 최선단 공정 마스크 값부터 먼저 지릅니다. 게다가 고객은 칩 한 알만 달라고 하지 않아요. 모델·소프트웨어·운영까지 묶어서 달라고 하죠.
그러니까 무너지는 지점은 실험실이 아니라 영업과 유지보수 쪽입니다. 성능 경쟁에서 밀렸다기보다, 성능을 유지하는 비용을 감당할 매출이 안 나온 거예요.
③ 한국이 택한 답 — 손님을 만들어 준다
이 관점으로 보면 지난주 국내 뉴스가 다르게 읽힙니다.
과기정통부와 한국지능정보사회진흥원은 올해 116억 8,000만 원을 들여 공공 CCTV 1만 8,100여 대에 국산 NPU를 도입한다고 7월 28일 밝혔습니다. 공모로 수요기관 세 곳(경상남도·울산광역시·한국도로공사)을 뽑았고, 각각 리벨리온·딥엑스·모빌린트의 NPU를 관제센터에 넣습니다. 경남은 산불과 홍수 같은 재난 탐지, 울산은 산업단지 안전과 치안, 도로공사는 고속도로 사고·정체 자동 탐지에 쓴다고 해요. 수요기관 선정까지 발표된 단계이고, 계약이나 설치 일정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7월 15일에는 업스테이지의 LLM ‘솔라’를 퓨리오사AI의 NPU ‘레니게이드(RNGD)’로 돌려서 포털 다음의 검색 요약 서비스에 붙였다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하루 약 5억 개 토큰을 처리하고 있고, 엔비디아 GPU와 비슷한 성능을 내면서 추론 비용은 50% 이상 아꼈다는 게 회사들 설명이에요. 업체가 낸 수치니 그대로 받아 적기보다 참고로 보는 게 맞겠지만, 모델·칩·서비스를 국내 기술로 이어 붙여 실제 서비스에 넣은 첫 사례라는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SK텔레콤이 7월 29일 A.X K2를 공개했죠. 총 6,880억 파라미터인데 토큰 하나를 처리할 때 실제로 쓰는 건 330억 파라미터인 구조고, 허깅페이스 저장소에서 직접 확인해 보니 라이선스는 Apache 2.0이 맞습니다. 상업적으로 갖다 써도 된다는 뜻이에요. 전작 대비 14개 벤치마크 평균 32.2% 향상, 장문·에이전트 평가에서 83.9% 향상이라고 회사는 밝혔고, 제조 현장 실증과 함께 군 부대 활용 계획도 언급됐습니다.
세 뉴스를 관통하는 단어는 손님입니다. 정부가 공공 관제라는 일감을 만들어 주고, 포털은 매일 트래픽을 태워 주는 실사용처가 되고, 통신사는 국산 칩에서 돌릴 만한 모델을 오픈으로 풀어 저변을 넓힙니다. 앞에서 본 두 가지 붕괴 원인 중 ‘살 사람을 모른다’ 쪽을 정면으로 겨냥한 처방이에요.
④ 그런데 자릿수를 맞춰 보면
여기서 한 번 냉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처방의 방향과 처방의 용량은 다른 문제라서요.
이번 CCTV 사업 예산은 116억 8,000만 원입니다. 헤일로가 쓰러지기 전까지 투자받은 돈이 3억 4,000만 달러였어요. 환율을 1,000원으로 잡든 1,500원으로 잡든, 이번 사업 예산은 헤일로가 태운 돈의 2~4% 수준입니다. 그록에 붙은 200억 달러와 비교하면 1,000배가 넘게 벌어지고요. 게다가 이 116억 8,000만 원은 세 회사가 나눠 갖는 데다, NPU 값만이 아니라 사업 전체 예산입니다.
그러니 이 사업 하나가 회사를 먹여 살리진 못합니다. 이건 매출이라기보다 레퍼런스에 가까워요. “공공 관제 현장에서 1만 8,100대 규모로 돌려봤다”는 이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쌓이는 현장 데이터와 운영 노하우가 진짜 상품이죠. 실험실 벤치마크로는 살 수 없는 물건이기도 하고요.
배경을 하나 붙이겠습니다. 지난해 11월 기사(2025년 11월 27일)에서 리벨리온 쪽 임원은 “정부가 엔비디아 GPU 26만 장을 도입한다는데 국산 NPU도 26만 장 구입해 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퓨리오사AI 쪽은 메타의 인수 제안을 거절했던 일을 언급했고요. 반년도 더 지난 발언이라 지금 상황과는 다를 수 있지만, 업계가 바라는 게 지원금보다 계속되는 구매라는 건 읽힙니다. 참고로 퓨리오사AI는 2세대 칩 RNGD 생산을 올해 2만 장에서 내년 4만~5만 장으로 늘린다고 7월 13일 보도됐어요. 그 물량을 받아 줄 손님이 계속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⑤ 그래서 뭘 보고 판단하면 되나
저는 앞으로 이 세 가지를 지켜보려고 합니다.
하나, 내년 예산에 같은 항목이 또 잡히는가. 도미노를 막는 건 큰 사업 한 번이 아니라 매년 돌아오는 발주입니다. 손님이 한 번 오고 마는 사람이면, 회사는 거기 맞춰 조직을 키웠다가 그대로 물려요. 1년 뒤 같은 줄에 예산이 또 잡히는지가 가장 정직한 신호입니다.
둘, 소프트웨어까지 사 주는가. 앞에서 본 붕괴 원인의 절반은 SDK 유지비였습니다. 칩만 사고 소프트웨어 대응은 알아서 하라고 하면, 회사는 하드웨어를 팔수록 유지비가 불어나는 구조에 갇혀요. 사업 공고에 유지보수와 모델 업데이트 대응이 별도 항목으로 잡히는지 볼 만합니다.
셋, 공공 밖에서 레퍼런스가 나오는가. 다음 AI 오버뷰처럼 민간 실서비스에서 매일 돌아가는 사례가 늘어야 합니다. 공공 조달로만 큰 회사는 공공 조달이 멈출 때 같이 멈추니까요.
덧붙이면, 오픈 라이선스로 풀린 모델이 여기서 은근히 중요합니다. 지난 다이제스트에서 가중치 공개를 ‘물건’이라고 불렀는데, 국산 칩 입장에서 오픈 모델은 최적화해 둘 표적이 고정된다는 뜻이거든요. 곡이 계속 바뀌면 악보를 매번 새로 써야 하지만, 다들 같은 곡을 연주하면 한 번 맞춰 둔 게 오래 갑니다. A.X K2가 Apache 2.0으로 나온 게 국산 NPU 진영에 반가운 이유죠.
한국은 도미노의 두 원인 중 하나(손님)를 정부가 대신 서 주는 방식으로 건드리고 있고, 나머지 하나(소프트웨어 유지비)는 아직 각 회사 몫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난주에 봤던 ‘누가 브레이크를 쥘 것인가’가 밖에서 벌어지는 논쟁이었다면, 이건 우리 쪽 계기판이에요. 눈금이 세 개 있고, 아직 바늘은 하나도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확인 지점을 달력에 적어뒀습니다. 내년 예산안이 나오는 가을, 그리고 이번 사업의 계약 공고. 그때 이 글을 다시 열어서 위 세 가지에 O·X를 쳐볼 생각이에요. 결과가 어느 쪽이든 그것대로 한 편이 되겠죠.